한 해 동안 만들어지는 한국영화는 모두 몇 편이나 될까요? 극장에서 정식 개봉되는 영화들 뿐만 아니라 영화제나 기획전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중단편까지 포함한다면 아마 수 백 편은 되지 않을까요. 윤성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은하해방전선>은 올 한 해 만들어진 그 많은 한국영화들 가운데 전국 7개의 상영관을 통해서나마 일반 관객들과 값진 만남의 기회를 얻은 작품입니다. 중단편들은 상영시간의 제약 조건이 있으니 제외를 하고서라도, 강이관 감독, 문소리, 김태우 주연의 <사과>(2005)와 같이 3년째 개봉 일자를 잡지 못하는 장편들이 있는 실정을 감안한다면 <은하해방전선>이 얻게된 기회는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조금은 다른 영화, 다르면서도 좀 더 좋은 영화를 찾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기회라고 생각됩니다.
<은하해방전선>은 영화에 관한 영화, 연애에 관한 영화, 그리고 영화와 연애를 묶어 소통이라는 공통 주제로 풀어놓은 영화입니다. 윤성호 감독의 페르소나 영재(임지규)는 애인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고 자신의 단편이 상영되는 삐~국제영화제에 참석하러 부산으로 갑니다. 장편 영화의 제작을 준비하는 영재에게 일본의 스타배우 기무라 레이(유형근)와의 만남은 현실적인 필요입니다. 왜냐하면 캐스팅이 되어야 투자, 그놈의 투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캐스팅을 하려면 무엇보다 좋은 플롯이 있어야 한다지만 주변에는 시나리오를 쓰는 아들 옆에서 플롯을 불어주면 플롯이 나온다고 믿는 어머니를 비롯해서 정작 플롯 정하기에는 도움이 안되는 소리들만 쏟아집니다. 다음 작품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헤어진 애인과의 문제 때문인지, 영재는 갑작스런 '플롯 상의 주인공처럼' 실어증에 걸리게 되고 사람의 말 대신 악기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영화감독 되기를 희망하는 2천명 중에 하나라면 누구나 겪게될 영화 속 경험담은 영화를 좋아하고 그것이 실제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는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함께 웃고 즐길 수 있을 만한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영화판 이야기와 함께 산만하게 교차되는 연애담은 관객에 따라 시시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관객의 가슴을 한번 찐하게 매만져주는 그놈의 플롯이 부족한 영화라는 얘깁니다. 어쩌면 기무라 레이라는 현실적 필요를 대하듯이 애초부터 그런 목적의 플롯 구성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하해방전선>은 뭉클한 감동을 전달하려는 노력 보다는 산만하게 배치한 것 같으면서도 결국 원하는 방향으로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고 매듭을 지어내는 연출과 편집의 역량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특히 음악과 음향을 효과적으로 배합하는 능력은(그것들을 시퀀스 내에 섞어넣는 참신한 아이디어까지 포함해서) 한국영화 내에서는 보기 드문 탁월함마저 느껴집니다.
<은하해방전선>이 일반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때깔이 좋다는 점입니다. HD로 촬영된 스크린 상의 화면이 무척 깨끗해서 보기 좋다는 점 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를 비롯한 전반적인 만듬새가 어색한 구석 없이 독자적인 리듬감을 끝까지 잘 지켜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김보경이나 이은성과 같이 이미 알려진 배우들을 포함해서 이렇게 연기력 좋은 배우들이 어우러진 장편 데뷔작은 신인 감독에게나 이 영화를 선택한 관객들 모두에게 상당한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에 이어 <은하해방전선>에서도 주연을 맡은 임지규가 이전 영화 속에 어떻게 겉돌았고 이번 영화에서는 어떻게 녹아들어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는지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매우 확연합니다.1) 적확한 캐스팅과 촬영 현장의 편안함 같은 것이 객석에까지 전달되는 영화가 <은하해방전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반적인 외양상의 만듬새에 있어서 만큼은 흠잡을 데가 별로 없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은하해방전선>에서 채택된 화법은 그 참신함 만큼이나 낯선 모습으로 비춰질 수가 있습니다. 너무 산만해서 도무지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는 관객들에게는 우디 앨런 영화와 같은 레퍼런스를 언급해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한가지 우려되는 부분은 산만하고 초현실적인 화법에 어느 정도 내성이 갖춰진 관객일지라도 주인공이 애인과 처음 만나고 싫증내고 헤어지고 그리워하고, 또 어떤 이와는 잠시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새롭게 시작하기로 하는 연애담 속에서 유효한 동질감을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가 않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실제 누군가와의 연애담이 아니라 영화와의 소통, 관객과의 소통 문제를 은유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진정성을 담고는 있으나 표현 방식이 유효하지 못했던 어떤 영화들과는 반대로 표현 방식은 충분히 세련되고 때로는 놀랍기까지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언가에 감응하기는 쉽지 않은 영화가 <은하해방전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인 감독의 출사표로서는 유효, 그러나 출사표란 어디까지나 미래에 대한 기약입니다.
1)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에서 한차례 홀라당 깼던 장면 가운데 하나는 인터넷을 통해 전달된 살인청부 제의가 모니터 위에 보여지는 장면이었습니다. 모니터 화면 전체가 새하얗게 뜨고 그 위해 문장 하나가 커다란 폰트로 전개됩니다. 이런 부분은 당연히 관객의 몰입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실책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든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와 같은 사실적인 톤의 영화에선 이런 장면이 없었어야 합니다. 차라리 모니터 뒤에서 놀란 표정의 주인공 얼굴을 잡아주고 스크린 위에 문장을 직접 찍어주는 식으로 했어야 합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처럼 영화 전반부에서는 인터넷 상에서의 대화를 계속 그렇게 처리하더니 왜 이 장면에서만 유독 별 생각없는 연출을 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은하해방전선>에선 헤어진 애인과 마지막 메신저 채팅을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웹캠까지 동원하며 동시대의 의사소통 수단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이 장면에서 주인공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짧은 단문들이 입력창에서 대화 화면으로 올라가는 방식을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그대로 보여줍니다. 세대에 따라 굉장히 낯설게 보일 수도 있는 장면이었지만 적어도 <은하해방전선>에서는 영화를 보던 중에 이 장면 하나로 소격 효과가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이외에도 영화 속에는 우리 말 뿐만 아니라 일본어와 영어까지 자유롭게 오고가고 상당히 많은 대화들이 자막으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온라인을 통해 교감하기 시작한 새로운 세대의 감성을 포착해낸 <접속>(1997)이나 <후아유>(2002) 보다 훨씬 과감하면서도 사실적인 동시에 비용 효율적이었던 장면 연출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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