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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씨네바캉스에선 '밥 포세'라고 소개가 되던데, 전 이 감독은 영화는 단 한 편도 본 게 없으면서 이름은 '밥 포시'로 표기하는 게 훨씬 익숙하단 말이죠. <카바레>는 물론이고 <올 댓 재즈>도 바로 이 감독의 영화. 그러나 국내에선 비디오도 DVD도 구하기가 힘든 영화였어요. 요즘은, DVD는 모르겠네요.

이 영화는 1973년 아카데미 시상식 당시 천하의 <대부>를 깔아뭉갠 영화로 악명이 높습니다. 미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무시무시한 걸작 <대부>는 당시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지만 3개 부문만을 타갔지요. 그러나 <대부>가 타간 상들은 꽤나 알짜배기 상이었기 때문에 억울해 할 이유가 거의 없습니다. 작품상, 각색상, 남우주연상이었으니까요. 애초에 <대부>에는 '주연'이라 할 만한 여배우도 없었고, 사실 뮤지컬 영화, 그것도 아주 잘 만든 뮤지컬 영화가 떡 버티고 서 있는데 음악상 같은 걸 주기도 그렇잖아요? 아카데미는 무명감독 코폴라는 박대했지만 분명 <대부>에게 작품상을 안겨주었고, 주연인 말론 브랜도에게도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어요. 밥 포세가 자격없이 감독상을 타간 것도 아니죠. 게다가 이 해엔 죠셉 맨케비츠(<탐정>)와 존 부어맨(<딜리버런스>)도 후보에 올랐습니다. <후보자>를 연출한 마이클 리치는 후보에 오르지도 못했고 고작 각본상 하나 후보에 올라 이것만 타갔습니다. 한마디로 <대부>와 함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영화들은 하나같이 기라성 같은 영화들이었습니다. 코폴라가 억울해할 바가 전혀 못 돼요.

그 해 아카데미 상을 쓸어간 건 바로 <카바레>였습니다. 여우주연상이 <카바레>의 라이자 미넬리에게 돌아간 건 너무 당연한 결과예요. 연기 잘 해, 춤 환상이야 노래도 잘 불러, 게다가 영화도 좋거든요. 남우조연상 후보는 총 다섯 명 중 세 명이 무려 <대부>의 배우들이었지만(알 파치노, 제임스 칸, 로버트 듀발) 역시 <카바레>의 조엘 그레이가 타갔습니다. 아마 이건 당시도 좀 의외였을 듯 싶어요. 아니면, <대부>에서 무려 세 명이나 올랐기 때문에 표가 분산됐을 수도 있죠. 쇼마스터 역으로 출연한 이 배우 역시 뮤지컬 배우로서 매우 출중한 능력을 자랑합니다. (<더티 댄싱>의 제니퍼 그레이의 아버지가 바로 이 양반이죠. 전 이 사람이 여장하고 나왔을 때 못 알아봤어요. 가발을 벗어던지고서야 으악! 했는데 그건 장안에서 저뿐만은 아니었답니다.) 그리고... 감독상, 편집상, 사운드상, 음악상, 의상상, 미술상 같은 걸 타갔지요. 화려한 퇴폐미를 자랑하는 뮤지컬 영화가 받아 마땅한 상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해의 아카데미 상은 워낙 <카바레>가 쓸고 다른 주요 부문은 <대부>가 쏙 빼갔기 때문에, 부어맨의 <딜리버런스>나 맨케비츠의 <탐정>이 낙동강 오리알이 된 신세였고 <후보자>는 후보에도 못 올라본 억울한 신세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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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숑가게 만드는 공연장면


그렇다면 과연 <카바레>는 그토록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영화였을까요? 네, 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춤과 노래가 섞여있는 뮤지컬 영화는 인기가 좋은 법입니다. 주디 갈란드의 딸 라이자 미넬리가 지 엄마만큼이나 재능 있고 잘 한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아카데미 취향에도 딱 맞지요. 사실 외모는 주디 갈란드가 좀더 예쁩니다만, 라이자 미넬라가 어필하는 '소년틱한' 이미지는 굉장히 묘한, 주디 갈란드의 예쁜 소녀적 매력과는 완전히 다른 마력을 갖고 있어요. 게다가 영화 초반 중절모와 검은 스타킹에 가터벨트를 메고 보여주는 공연은 정말 사람을 한순간에 보내버릴 정도로 환상적인 매력을 자랑하는걸요. 조엘 그레이와 나란히 "머니머니머니~"를 읊어대는 코믹한 춤과 노래는 어떻고요? 게다가 이 영화는 배경이 1930년대 베를린입니다. 영화 초반, 극장에서 쫓겨났던 나치 대원은 영화의 말미 당당하게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쇼를 보고 있습니다. 대체로 손가락질 당하며 "이뭐병" 취급을 받던 나치가 10대와 20대의 피끓는 '아이들'에게 퍼져나가며 점차 힘을 얻어가는 바로 그 시기!를 지저분한 설명없이 컷 몇 개로 딱딱 보여줍니다. 그리고 곧장, 사회가 어지럽고 불안할수록 퇴폐미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걸 탁, 보여주지요. 스토리라인은 퍽 간단하지만, 꽤 파격적이기도 해요.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굉장히 파격적이죠. 외교관의 딸로서 유럽 어느 카바레에서 댄서 노릇을 하며 '배우가 될 거야' 이러고 있는 여주인공이라뇨. 워낙 색에도 밝고, 애인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와 자는 걸 아무렇지 않아 합니다. 전 이 영화에서 가장 걸작인 장면이 그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브라이언 : 그렇게 그 남작이 좋으면 가서 같이 자!
샐리 : 그러고 있는데
브라이언 : (충격을 받아 한동안 말을 못한다)
브라이언 : 나도 그래

미국에 몰아치고 있던 히피의 바람과 그 여파로 <오멘> 같은 영화가 나오고 있던 시절(네, 전 <오멘>을, 히피 자식들이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중산층 부모 세대의 불안한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영화라 생각합니다.)입니다. 내 아이를 가졌는지 저 남작의 아이를 가졌는지 모를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약속하고 그 아이를 내 아이로서 받아들이는 남자나 정조 개념 같은 건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아예 보이지 않는 여자가 사랑스러운 주인공들로 나오기에 지극히 어울리면서도, 지극히 어색한 그런 시대였죠. 배경이 아마 유럽이기에 가능했을 겁니다만. 당시 미국인들에게 유럽은 아무리 혁명이 실패했어도 그 여파는 남았던, 그런 곳이었을테니까요. 1930년대가 다시 호출된 것은 분명 정치적인 맥락이 있겠지만요. 사실 이런 여주인공 캐릭터는 딱 천박해지기 쉬운데, 라이자 미넬리의 소년같은 외모(허리가 없죠, 언니가...)와 천진난만함이 샐리 보울즈라는 캐릭터를 그저 하고픈 게 있으면 그대로 해버리는 딱 '어린아이'같은 캐릭터로 만듭니다. 펭귄머리를 하고 이따만한 인조눈썹에 시커먼 눈화장을 하고 나오는 라이자 미넬리는 사실 성숙한 섹시미보다는, 귀엽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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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고 깜찍하기도. "머니머니머니~"를 부르는 장면.


영화의 말미, 임신중절 사실을 안 브라이언은 샐리의 곁을 떠나고, 샐리는 여전히 신나는 얼굴로 무대에 오릅니다. 하지만 전 그 마지막 장면이 참 슬펐어요. 프로는 아무리 속이 썩는 일이 있어도 무대 위에선 밝고 신나는 얼굴로 쇼를 선보여야 하죠. 천진난만하고 세상 무서운 건 모르던 초반의 샐리와, 영화 말미에서 아기를 낙태하고 애인을 떠나보낸 뒤 무대에 오르는 샐리는, 둘 다 똑같이 활짝 웃으며 신나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살짝 질감이 다릅니다. 사람이 어른이 된다는 건, 속에 이따만한 돌덩이를 품고 심장은 철철 피를 흘리고 있으면서도 순간순간의 희망과 웃음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며 열심히 살아가고, 그렇게 살아남는 것이란 생각이 요즘 들어요. 그렇게 샐리는 피눈물을 속으로 삼킨 채 여전히 쇼를 해요. 앞으로도 그렇겠죠. 영화에 명시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샐리가 임신중절 수술을 한 건 브라이언이 장학생 지원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란 사실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어요. 따져묻는 브라이언에게 샐리는 "나 원래 이렇잖아, 내가 한 변덕 하잖아."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지만, 샐리에게 청혼하며 '옥스포드에 장학금 신청했다'던 브라이언이 얼마 후 더없이 어두운 표정을 하며 샐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고민에 빠져있는 장면(바로 여기서 샐리는 임신중절을 결심하는 것 같습니다만)이 들어간 건 바로 그 때문이겠죠. 브라이언에겐, 결과적으로는, 마침 사실 좋은 핑계거리가 제발로 찾아와준 거고요. 그는 샐리와의 관계를 지속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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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쇼라네~!! 가운데 광대분장의 쇼마스터가 조엘 그레이.


우린 여기서 또 한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진난만한 척 바보인 척 그저 신나서 헤헤거리는 백치미 넘치는 여자들의 얼굴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 그녀들의 실없는 짓은, 어쩌면 당신을 마음깊이 배려하는 큰 희생을 해놓고도 그 사실로 당신을 옥죄지 않기 위해 피눈물을 삼키며 쓴 가면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 소위 '착한 남자'들 중 일부는, 당연히 책임지고 나쁜놈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쁜놈이 되기 싫어서 결과적으로 여자에게 온갖 짐을 다 떠넘기고 상대를 나쁜년으로 만드는 데에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답니다. 여자들은 또 이런 남자들을 조심해야 하죠. 브라이언도 비스무리하죠. 진정 사랑했다면 남자건 여자건 기꺼이 그 죄짐을 먼저 졌을 겁니다.

어쨌거나, 나치가 득세하고 애인이 가건말건 공연을 계속하는 샐리를 보며 당연한 교훈 하나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거죠 : 쇼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쭈욱.

영진공 노바리


ps. 워낙 유명한 뮤지컬이 원작인지라, 성공적인 영화화 이후에도 지금도 꾸준히 전세계 무대에 올려지고 있습니다. 샘 멘데스가 연출하고 제인 호록스가 주연한 TV 버전이 있던데, 이거 한번 보고싶어지네요.

Posted by Nowhere_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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